3. 군 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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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연천문화원 작성일20-08-07 10:23 조회1,042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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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군 지정문화재(향토유적 25개 무형문화재 2개)
① 낙선군 이 숙묘
지 정 별 : 향토유적 제1호
지정일자 : 1986. 4. 10
소 재 지 : 청산면 궁평리 623번지
낙선군 이숙 묘는 앞으로 궁평리 마을을 바라보고 좌(북)로 궁평초교, 뒤로 나지막한 구릉이 있는 해발 120m 가량의 구릉 중턱에 동향하여 위치한다.
묘는 용미와 활개를 갖추고 있고, 동원군부인 김씨(東原君夫人 金氏)와의 합장분이다. 봉분은 원형으로 하단에는 높이 40cm, 길이 246cm의 장방형 호석 7매로 둘려져 있는데, 규모는 남북 직경 660cm·동서 직경 870cm·높이 205cm이다.
석물로는 봉분 전면에 혼유석·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우에는 동자석·망주석·문인석이 각 2기씩 있다. 상석은 너비 187cm·폭 119cm·두께 49cm이고 2개의 원형고석은 귀면(鬼面)이 양각되어 있다.
향로석의 규모는 높이 61cm·너비 39cm·두께 33cm이며, 동자석의 높이는 좌편 101cm·우편이 109cm, 망주석은 좌·우 높이 180cm이고, 문인석의 높이는 좌측 172cm·우측 180cm이다. 묘비는 봉분의 전면에 위치하여 비좌·비신·옥개석을 갖추고 있다. 비좌는 백색대리석으로 장방형 대석의 상부를 말각하였다.
비신 역시 백색대리석으로 전·후 양면에 비문이 있다. 전면에는 종3열로 「有明朝鮮國 王子樂善君 贈諡靖憲公潚之墓 東原君夫人金氏祔左」의 비문이 있고, 후면에는 「崇禎戊辰紀元後九十九年丙午日 日 立」의 年記로 보아, 1726년(영조 2)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신위에 놓인 팔작지붕형의 옥개석은 처마가 거의 ‘一’자로 밋밋하나 처마 밑의 2단 서까래와 암·수막새, 기와골 등의 조각표현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규모는 비좌 높이 48cm·너비 124cm·두께 80cm, 비신 높이 148cm·너비 58cm·두께 26cm, 옥개석 높이 52cm·너비 99cm·두께 71cm이다. 신도비는 묘역입구 도로변에 있었으나 묘역에 있던 장명등과 함께 일제때 밀반출되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樂善君神道碑銘帖』에 의하면 신도비의 건립연대는 영조 3년(1727)으로 되어있고 비문은 도총관 박필성(朴弼成)이 찬하고, 여성군 이집의 글씨와 서평군 이요(李橈)의 전자로 되어있다.
낙선군 이숙(1641~1695)은 인조(仁祖)와 귀인 조씨(貴人趙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휘는 숙(潚)이고, 자는 자숙(子淑)이며,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1648년(인조 26) 낙선군에 봉하여졌다. 병자호란 이후 불안정하던 시기에 사신으로 수차 청(淸)에 왕래하면서 외교와 함께 정세를 탐지하면서 국정을 도왔고, 지난날 부왕 인조의 삼전도 치욕으로 청을 토벌할 계획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북벌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곳 궁평리로 낙향하여 1695년(숙종 21) 5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어릴 때부터 당파싸움에 휩쓸렸으나 현명하고 행실이 좋아 숙종대에는 더욱 우대받았으며, 1772년(영조48)년 그의 사우(祠宇)를 수진궁(壽進宮)에 두었다.
② 향토문화재 제 2호 연천향교
지 정 별 : 향토유적 제2호
지정일자 : 1986. 4. 10
소 재 지 : 연천읍 차탄리 345번지 일대
연천군청 앞의 삼거리에서 군남면 옥계리로 넘어가는 도로를 타고 약 100m 가량 진입하면 산 밑의 남쪽으로 꺾어지는 길이 나타난다. 이 길을 따라 약 100m쯤 가면 연천향교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1379년(태조7) 읍내리 부근에 세워진 연천향교는 그 후 1658년(효종 9)에 1차 이전하였고, 한국전쟁 중에 전소(全燒)되었다가 1965년 차탄리 부근에 관내 유림에서 재건하였다. 그러나 재건된 향교도 도로공사로 인해 1989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현재는 대성전, 명륜당, 동·서재, 내·외삼문 등 6개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향교는 하마비와 홍전문을 지나면 외삼문이 있고 유생들의 학업장소인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 서재가 있다. 내삼문을 지나면 향교의 주 건물로서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 위치한다. 현재 매년 공자 탄신일(음력 8월 27일)에 공자를 기리는 석전제(釋奠祭)가 올려지고 매월 음력 1일과 15일에 분향이 이루어지고 있다.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위와 송나라 2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位牌)가 봉안되어 제향(祭享)의 기능은 남아있으나, 과거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이어지지 않고 있다.
③ 향토문화재 제 3호 북삼리 석조여래 입상
지 정 별 : 향토유적 제3호
지정일자 : 2012. 4. 20
소 재 지 : 왕징면 북삼리 160-4
현재는 폐교된 북삼분교의 운동장 동쪽에 위치한 민가(民家) 위쪽의 낮은 야산 어귀에 위치한다. 원래 넘어져 방치되어 있던 것을 40여 년 전 인근 주민들이 일으켜 세웠다..
각섬석운모편암재의 석불입상은 전체 높이가 135㎝이고, 광배를 포함한 너비는 119㎝이며, 두께는 14~19㎝이다. 광배 상단 부분과 얼굴이 심하게 파손되었지만, 나머지는 대체로 양호한 상태이다. 전체적으로 평면성이 강한 浮彫처럼 조각되어 있으나, 허리 부분이 과장되게 들어가 있다.
얼굴은 몸에 비해 큰 편인데, 마모가 심하여 육계가 높고, 귀와 코가 매우 크다는 점 외에 구체적인 형상은 알 수 없다. 목은 매우 짧아서 마치 얼굴과 어깨가 붙어 있는 것처럼 어색하고 둔중한 느낌을 준다. 복장은 통견이며, 간략하게 선각된 포물선형의 주름이 아래쪽으로 반복되어 전개되고 있다. 수인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취하고 있는데, 오른손의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구부린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광배는 문양이 전혀 조각되지 않은 단순한 형태이다.
입상 앞에는 9엽의 연화가 조각된, 직경 90㎝의 원형 판석이 놓여 있다. 중앙에 단이 진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불상의 대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양식적으로 통일신라의 불상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신체표현이 어색하고 평면성이 강한 점 등으로 미루어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④ 향토문화재 제 4호 운성부원군 묘
지 정 별 : 향토유적 제 4호
지정일자 : 1986. 4. 10
소 재 지 : 장남면 반정리 산55번지
운성부원군 박종우(?~1464)는 조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운봉(雲峰)이고 찬성 신(信)의 아들로 태종의 사위이다. 1419년(세종 1) 태종의 서녀 정혜옹주(庶女 貞惠翁主)와 결혼하여 운성군(雲城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자헌대부에 승품했다. 묘역은 반정리의 민통선 내 주한미군 사격장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혜옹주와의 합장묘이다. 북동향한 나지막한 구릉에 2기의 묘가 위아래로 나란히 있는데, 아래의 묘는 결성장씨(結城張氏)의 묘이다.
봉분은 원형으로 규모는 직경 780㎝·높이 200㎝이다. 묘 앞에는 660cm의 간격을 두고 2단의 계체석을 갖추고 있다. 석물은 봉분 전면에 상석 2기, 장명등, 묘표가 있고 좌·우측에 문인석이 2기씩 총 4기가 있다. 상석은 너비 157㎝·폭 113㎝·두께 22cm이다. 상석전면에는 앞뒤로 사각화창을 둔 화사석과 사모지붕의 옥개석 위에 보주를 조각한 장명등이 있는데 높이는 168㎝이다.
그 앞에는 4각 복련대좌를 한 간략한 형태의 묘표와 좌우로 대칭을 이루며 묘역을 수호하고 있는 문․무인석 4기가 있다. 높이는 좌측 앞편 187㎝·뒷편 176㎝, 우측 앞편 170㎝·뒷편 174㎝이다.
묘표는 1466년(세조 12) 3월에 건립된 것으로 비좌와 비신을 갖추고 있는데 비좌는 전면이 일부 파손되었다. 비신은 상부의 양 귀를 말각하였으며 전·후 양면에 비문 및 수직의 결이 있고 검게 산화되어 있다. 전면에는 종2열로 「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綏祿大夫雲城府院君 貞惠翁主合墓」, 後面(후면)에는 「成化四年三月立 于御侮將軍繼孫立石」의 비문이 있다. 규모는 비좌 높이 12cm·너비 81cm·두께 50cm, 비신 높이 144cm·너비 48cm·두께 15cm이다.
1423년(세종 5) 사은사(謝恩使)로 명에 다녀온 뒤 정2품인 정헌대부 삼군장수, 호조판서, 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했다. 그는 1447년(세종 29)에 이조판서 좌찬성을 거쳐 1453년(단종 원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이 되고 운성부원군(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집이 대대로 부유하여 윤사로(尹師路)·윤사균(尹士畇)·정인지(鄭麟趾)와 더불어 재물을 저축한 것이 서로 동등하였으므로 사부(四富)라 일컬었다. 1455년(세조 원년)에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어 정1품인 유록대부에 올랐으며 시호는 성열(成烈)이다.
⑤ 향토문화재 제 5호 남양홍씨 팔효문
지 정 별 : 향토유적 제5호
지정일자 : 1989. 9. 22
소 재 지 : 중면 횡산리 168번지
중면 횡산리의 민통선 지역 안에 위치한 정려문(旌閭門)이다.
지극한 효심과 부모에 대한 봉양을 행한 남양홍씨 1효부, 7효자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숙종조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며, 현재의 것은 한국전쟁 중에 소실되었던 것을 후손들이 1988년에 복원한 것이다. 이들 효행자의 목록은 홍여공(洪汝恭, 1377~1440)의 아내 효부 동래정씨(東萊鄭氏), 효자 홍한경(洪漢卿), 효자 홍림(洪霖), 효자 홍범(洪範, 1605~1693), 효자 홍삼준(洪三俊, 1644~1715), 효자 홍삼석(洪三錫, 1654~1718), 효자 홍하적(洪夏績, 1700~1778), 효자 홍종옥(洪宗沃, 1737~1787)이다.
효부 동래정씨는 시아버지가 심한 등창으로 치료할 방법이 없게 되자 밤낮을 쉬지 않고 종기를 빨아 3일만에 소생시킨 공으로 정려를 받았다. 묘는 양주군 광적면에 있다. 효부 동래정씨의 손자인 홍한경은 이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아버지가 전염병으로 닭고기를 먹고 싶다 하자, 의원이 닭고기가 병에 크게 해로울 것이라 하므로 감히 올리지 못하였는데, 마침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이를 통탄하게 생각하여 평생 닭고기를 먹지 않고 유언에도 자기 제사에는 닭고기를 쓰지 말라고 했다한다. 묘는 파주군 교하면에 있다.
홍한경의 손자인 홍 림은 이조정랑을 역임했다. 어머니 전주이씨가 병환이 급하여 소생할 길이 없자 손가락을 잘라 어머니 입에 피를 흘려 넣어 마침내 소생시켜 천명을 누리게 하였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3년 동안을 눈물로 거상하였다. 묘는 파주군 교하면에 있다.
홍림의 손자인 홍 범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병자호란때 어머니가 병들어 세상을 떠나자 거상의 예절에 소홀함이 없었다한다. 묘는 중면 횡산리 고동골에 있다.
홍범의 맏아들 홍삼준은 아버지가 치료 불가능한 큰 종기가 생겨 매우 위독할 때 아우들과 함께 16일 동안 환부를 빨아 회생시켰다. 묘는 중면 횡산리 고동골에 있다. 홍범의 삼남인 홍삼석은 형과 같은 효행으로 예조참의가 추증되었다. 묘는 횡산리 안골에 있다.
홍삼준의 손자 홍하적은 아버지가 급한 병에 걸려 방어를 찾자, 하적이 울며 시냇가에 방황하니 마침 바다에만 나는 방어 한 마리가 얕은 물에서 뛰어 노는 것을 보고 잡아서 올리니 회생하였다. 벼슬은 감역을 역임하였고 묘는 횡산리 동막골에 있다.
홍삼준의 증손 홍종옥은 지극한 효심이 있는 자로 어머니 평산 신씨가 병환이 급하여 앵두를 찾았으나 때는 9월이 되어 앵두를 구할 수 없었다. 종옥이 나무를 향하여 간절히 비니 10여개의 빨간 앵두가 서리 맞은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기적이 일어나 어머니가 소생하였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지평이 되었으며 묘는 황산리 안빙애에 있다.
⑥ 향토문화재 제 6호 영원부원군 묘
지 정 별 : 향토유적 제6호
지정일자 : 1987. 12. 29
소 재 지 : 미산면 아미리 산132-1번지
윤호(尹壕, 1424~1496)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숙보(叔保)이다. 딸이 조선 제9대 성종의 왕비가 되어 정현왕후(貞顯王后)가 되자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1447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 밀양부사, 양주목사를 역임하였고 성종19년 영돈령부사에 이르고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이후 연산군 2년(1496) 73세를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성품이 검소하고 교만함이 없어 외척으로서 세도(世道)를 찾을 수 없었다.
묘 앞에는 묘비(墓碑),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그리고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이 각기 배치되어 있다 봉분 앞의 묘비는 비좌(碑座)와 비신(碑身), 이수(螭首)를 갖추고 있는데 비신은 검게 산화되어 있으며 이수는 한마리 용을 구름무늬와 더불어 잘 표현하고 있다.
묘 아래쪽에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신도비(神道碑)가 건립되어 있는데, 수많은 탄흔으로 판독은 불가능하며 백색의 대리석의 비신 및 구름무늬와 용의 조각이 매우 정교한 이수를 갖추고 있다.
⑦ 향토문화재 제 7호 연천고인돌공원
지 정 별 : 향토유적 제 7호
지정일자 : 2012. 4. 20
소 재 지 : 연천읍 통현리 199-2번지
연천 통현리 고인돌공원은 원상태의 보존이 어려운 연천지역의 고인돌을 조사한 후 효율적으로 보존․관리하고자 이곳에 이전․복원(2003년11월~2004년6월)하여 고인돌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현재 이 곳에는 16기의 고인돌이 이전․복원되어 있으며, 그 중 2기는 발견 당시의 위치에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다.
⑧ 향토문화재 제 8호 남순하 효자문
지 정 별 : 향토유적 제8호
지정일자 : 1987. 12. 29
소 재 지 : 전곡읍 간파리 230-1번지
전곡에서 양주시 황방리 방면으로 넘어가는 도로를 타고 가다가 간파리 간패마을로 들어서면, 이 마을의 어귀에 몇 그루의 큰 보호수가 있고 이 나무 동편에 서향하여 정려각이 세워져 있다.
정려현판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한 정려각 안쪽에 세워져 있는데, 우측의 것이 남순하 효자문이고 좌측의 것이 남순하의 손자인 남업(南璞)의 처에 대한 열녀문이다.
정려문 현판에는「孝子嘉義大夫同知中樞府使宜寧南舜夏之門」, 「烈女南璞妻孺人淸風金氏之門」라 하여 이들 효자와 열녀에 관한 행실을 밝히고 있다.
남순하는 1694년(숙종 20)에 출생하여 1776년(영조 51)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인물로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병환중의 아버지를 위해 겨울 눈 덮인 산속을 헤매며 고사리를 찾아 병환을 낫게 하였으며 얼어붙은 강을 깨고 잉어를 잡아 부모님을 봉양하는 등의 극진한 효행을 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게 되어 영조의 명에 의해 이 효자문이 내려지게 되었는데, 원래의 것은 한국전쟁 중 소실되었으며 지금의 것은 전후 후손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⑨ 향토문화재 제 9호 윤인함 묘
지 정 별 : 향토유적 제9호
지정일자 : 1987. 12. 29
소 재 지 : 청산면 백의리 산26-1번지
묘는 청산면 백의2리 나지막한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 윤씨 선영 묘역의 최상단 부분에 남동향하고 있다.
묘는 용미의 흔적이 있으며, 원형의 봉분은 직경 770cm·높이 160cm이고 묘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망주석·묘비 등 최근에 건립한 석물과 원래부터 있던 문인석이 1기 있는데 문인석의 높이는 140cm이다. 묘비는 우암 송시열의 비문으로 1617년(광해군 9)에 건립되었으나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87년에 재건하였다.
비신 전면에는 종5열로 「嘉善大夫行刑曹參判宣武原從功臣贈嘉義大夫吏曹參判兼經筵同知春秋館義禁府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世子左副賓客尹公諱仁涵之墓 配贈貞夫人羅州丁氏祔左」라 되어 있다.
또한 윤인함 묘역 입구에는 사각의 대좌와 옥개석, 오석비신으로 이루어진 신도비와 그 옆에는 안상과 복련이 조각된 대좌와 옥개석을 얹은 화강암 비신으로 된 동도복성비(東都復城碑), 최근에 건립한 통례공 묘역 정화중수 기념비가 있다. 신도비는 1639년(인조17)에 건립된 것으로 이조참판 민병승(閔丙承)이 찬하고 비서원승 김녕한(金寧漢)의 글씨와 규장각학사 윤용식(尹用植)의 전자로 되어있다. 동도복성비는 1922년 건립된 것으로 경주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윤인함(1531(중종26)~1597(선조30))은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자는 양숙(養叔)이고 호는 죽재(竹齋)이며, 돈녕부첨정 응규(應奎)의 아들이다. 22세 때인 1553년(명종 8)에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155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1584년(선조17)에는 동지사로 명(明)에 다녀오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 시, 경주부윤으로 재직 중 적군을 방어하지 못한 죄로 좌천당하였으나 경주성이 함락된 후 의병을 모집하여 경주성의 회복에 큰 공을 세워 선무원종호성공신(宣武原從扈聖功臣)이 되었다. 이 후 1597년에 형조참판이 되었다. 이 해 영위사(迎慰使)로 명(明)에 장수를 맞이하러 평양으로 갔다가 객사하였다. 문장과 그림에 능하였고, 특히 대(竹)를 잘 그렸다고 한다. 사후에 이조참판, 대제학에 증직되었다.
⑩ 향토문화재 제 10호 아미산울어리(무형문화재)
지 정 별 : 무형문화 제10호
지정일자 : 1989. 9. 22
울어리란 해마다 추수를 앞두고 산마을 주민들이 한데 모여 겨우살이에 대비한 땔나무를 하고 저녁 무렵, 나무 베기가 끝날 무렵 잡목으로 가마를 만들어 연장자를 태우고 마을로 돌아와 마당놀이를 벌이며 마을 주민의 화평단합과 풍년에 감사하는 농민들의 놀이이다.
이 놀이는 1950년 이전까지 연천군 중면, 미산면, 왕징면, 신서면 등지에서 세습적으로 연희되어 오다가 남북분단으로 중단되었던 것을 1970년대 후반 유촌리의 고 이재순옹과 마을 원로들의 노력에 의해 원형이 복원되어 전수되기 시작하였다.
전체 놀이의 구성은 네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풋나무 베기는 이른 아침 마을사람들이 풋나무 베기에 필요한 연장을 들고 근처의 야산으로 올라 상겨리, 중겨리 하겨리의 세 패로 나누어 나무 베기 일을 시작하는데 이 때 울어리소리인 풋나무 베기를 각 패가 메기고 받으며 일을 한다.
두 번째 놀이는 남녀행차로, 울어리패가 풋나무베기가 끝나면 한 사람이 탈 수 있는 가마를 현장에서 2개를 제작하여 각각 최고 연장자(영좌)를 태워 남녀부사라 칭하며 가마에 태워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마을로 내려오는 남여행차를 벌인다.
세 번째 놀이는 농기싸움으로 두 개의 남녀와 농기를 중심으로 편을 갈라 상대편의 농기를 뺏는 싸움이 벌어진다. 이 싸움의 결과로 진 패거리의 부사는 상대편 부사에게 큰 절을 하고 이어 승자는 아량을 베풀어 상대편 부사가 남여에 오르기를 권하며 서로 둥실 둥실 춤을 추며 산 주인의 집을 향해 행진을 계속한다.
네 번째의 마당놀이는 산주의 마당에 도착한 모든 일행이 일 년 열두 달을 주제로 한 둥게타령을 메기고 받으면서 농악과 소리에 맞추어 한바탕 놀이가 크게 벌어진다. 이 놀이가 끝나면 주인집에서는 술과 음식을 내와 함께 그날 노동으로 인한 고단을 풀고 풍년을 기원하며 함께 노래하며 춤을 춘다.
아미산울어리는 우리나라 전역에 전래되고 있는 많은 농요 가운데 겨우살이인 월동에 대비하기 위해 초가을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며 풋나무 베기와 다양한 구성의 놀이를 하는 흔하지 않은 민속놀이로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은 수상경력도 있다.
현재 아미산 울어리는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는 놀이여서 그 명맥이 이어지지 못하고 문화원에 의해 그 원형만이 전승되고 있다.
⑪ 향토문화재 제 11호 미산성주걸이
지 정 별 : 무형문화 제11호
지정일자 : 1989. 9. 22
예로부터 새로 집을 짓거나 이사를 한 뒤 집을 지킨다는 가신(家神)인 성주를 받아 들여 모시는 가택신앙(安宅信仰)의 놀이인 성주걸이는 집안의 부귀번영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1980년대 유촌리의 고 이재순옹에 의해 발굴된 미산성주걸이의 놀이구성은 전체 네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마당은 지관에 의해 집터가 정해진 곳에 일꾼들이 풍물을 치며 모여 농악과 춤이 벌어지는 앞 놀이가 벌어지고, 이어 둘째 마당은 집터에 고사를 드린 후 일꾼들이 ‘당겼나 당겼지, 두리산 나린줄기 - 당겼나 당겼지’로 시작되는 앞소리와 뒷소리의 메기고 받는 것에 맞춰 가래질을 하며 집터 닦기와 힘찬 율동의 지경다지기가 이어지는데 이때 가래질소리와 지경다지기 소리가 길게 이어진다.
셋째 마당은 집을 짓는데 필요로 하는 각종 재료를 만드는 과정으로, 이 때 일꾼들이 힘을 덜고 능률을 올리기 위해 노동요를 부르며 모든 작업이 진행된다.
이어 집이 완공되면 네 째 마당이 시작되는데 주인은 고사덕담으로 성주받이 굿을 드린 후 온 마을 사람들과 새집에 잡귀와 잡신이 나타나지 않도록 준비된 술과 음식을 나누며 한마당 어울리는 마당놀이를 흥겹게 벌이면서 모든 연희과정을 마친다.
⑫ 향토문화재 제 12호 임장서원
지 정 별 : 향토유적 제12호
지정일자 : 2001. 7. 19
소 재 지 : 연천읍 동막리 490번지
3번 국도를 타고 연천 고인돌공원을 지나 1km 정도가면 아미천을 건너는 애미교가 나온다. 서원은 이 애미교를 지나 약 350m 가다가보면 우측편 야트막한 구릉에 남향하여 위치한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자치운영기구였다. 임장서원은 조선 중기 중종 때 임계중(任繼重;1418~1544)이 정계를 은퇴하고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건립한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모태로 하여 창건되었다.
이후 1700년(숙종 26)에 주자서원(朱子書院)을 창건하여 주자의 위패를 모셨다. 임계중(1481~1543)은 중종 때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 정계를 은퇴하여 연천의 동막리로 낙향, 주자학연구에 전념한 학자이다. 1713년(숙종 39) 주자서원은 「임장」이라 사액되어 임장서원으로 개칭되었으며 1801년(순조 1)에 유림의 상소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을 배향하였다.
임장서원은 경내에 사우, 강당, 동·서재, 전사청 등의 부속건물을 갖추고 있었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고, 한국전쟁 당시 일부 남아 있던 건물마저 전소되었다.
현재의 서원 건물은 1995년부터 1998년 사이에 재건된 것이다. 서원은 남향하여 삼문(三門)이 있고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사우형식을 갖춘 목조 맞배지붕의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 중앙에 주희의 위패와 우측에 임계중, 좌측에 송시열의 위패를 모셨다.
재건과정에서 기존의 서원 유지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현재의 임장서원이 서있는 남쪽 경작지에 원래 서원의 구조물로 여겨지는 석재와 기와 편 등이 산재되어 있다. 서원 재건 후 지역 유림들의 발의로 만절당 임계중(晩節堂 任繼重)이 추배되었다.
⑬ 향토문화재 제 13호 강릉김씨 묘역
지정별 : 향토문화재 제13호
지정일 : 2012.04.20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통현리 산 6-1
고려중기 5대 가문으로서 명문가문을 형성했던 강릉김씨는, 고려말 김양남(金揚南)이래 연천 은대리(음터)일대에 터전을 잡은 이래 연천지역 곳곳에는 이들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김첨경의 5대조인 김양남은 고려 유신으로서 절개를 지켜 지금의 연천 전곡으로 은둔하였고, 이후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김첨경이래 7대 2백여년 동안 한사람의 영의정과 열두사람의 판서를 배출함으로서 명문가문이 이어졌다. 특히 통현리 일대 건정동 마을에는 김첨경의 부(父) 김충정이래 이들 강릉김씨 묘역이 집중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들 묘역 중에서 특히 금석문적으로 뛰어난 묘인 김양남 묘, 김시환 묘, 김시혁 묘, 기계유씨 묘, 김상성 묘, 김노진 묘 등 6기가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⑭ 향토문화재 제 14호 은거당 터
지정별 : 향토문화재 제14호
지정일 : 2012.04.20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798
은거당(恩居堂)은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이 말년에 자연을 벗 삼아 저술 활동을 주로 행하였던 곳으로, 허목이 84세가 되던 해인 1678년(숙종 4) 국가에 공이 많은 신하를 예우하기 위하여 왕명의 특전으로 건립된 7칸 규모의 가옥이었다.
허목은 은거당이 완성된 후 당호(堂號)를 「수고은거(壽考恩居)」라 하고 괴석원(怪石園), 십청원(十靑園) 등의 정원을 손수 가꾸었다. 은거당에는 허목의 각종 유품을 비롯하여 정원의 각종 괴석, 희귀목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와중에 건물은 전소하였고 그나마 남아 있던 정원의 괴석과 희귀목들도 모두 밀반출되었다. 다만 근래에 십청원에 있었다는 「석호(石戶)」 명문 괴석이 발견되어 허목의 묘 아래에 옮겨져 있다.
현재 은거당지에는 ‘은거당옛터’라 음각한 커다란 안내 비가 조성되어 있다.
⑮ 향토문화재 제 15호 신 호 묘
지정별 : 향토문화재 제15호
지정일 : 2012.04.20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유촌리 산 140-2
사간공 신호는 고려 때에 관직에 올라 공양왕(恭讓王) 때 승추원지신사(知申事)로 왕명(王名)의 출납을 맡아보았다. 그 뒤 이성계(李成桂), 정도전 등이 역성혁명을 기도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1392년(공양왕 4년) 7월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선위(禪位)할 때 옥쇄(玉璽)를 차마 직접 줄 수 없다 하여 지신사였던 신호에게 임의(任意)로 처리하라고 하니 그는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목숨을 바칠지언정 어찌 옥쇄를 빼앗으려 하는 자에게 옥쇄를 바치리까?"하며 옥쇄를 부둥켜 안고 있으니, 이성계가 위엄(威嚴)을 떨치며 주변 신하(臣下)에게 명(命)하여 힘으로 빼앗으려드니 부득이 역부족이자 옥쇄를 던져서 땅에 내리쳐버리니 옥쇄는 부수어져서 그 일각(一角)이 조각났다.
이를 보고 있던 공양왕은 “과연 그대는 참다운 고려(高麗)의 신하로다”라고 하였으며, 이성계 역시 지켜보고 있다가 그를 보며 “진실로 고려의 충신이다”라고 극찬하였다. 양위 직후 신호는 벼슬을 사직하였다.
이태조는 즉위 초에 그를 불러 전리사판서(典理司判書)의 벼슬에 임명하였으나 그는 고려의 신하를 자처하며 불사(不仕)의 뜻을 밝히고 고향인 평산으로 낙향(落鄕) 하려하였다. 이에 태조는 치서(致書)를 내려 내가 한양(漢陽)으로 가려하니 옛 붕우(朋友)의 정(情)으로 잠시 강(江)가에서 상면(相面)했으면 한다는 내용을 전했다.
그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배를 타고 강가에서 기다리니 이성계가 탄 배가 나타났다. 이어 그와 손목을 잡고 예(禮)로써 대하며 옛정을 나누어 국사(國事)에 대한 정담(政談)은 언급하지 않고, 시(詩)를 읊고 술을 권하며 바둑으로 지내다가 이별하였다.
"그대는 어젯날에 이시중(李侍中)이요, 오늘날은 새 나라의 국왕이고, 나는 어젯날의 신지신(申知申)이요, 오늘날은 이 나라의 신하이니 다시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또한 평산은 고려조에서 봉해준 성관향(姓貫鄕)이라 퇴거(退居)하여 옛 뜻을 잊지 않고 지키며 항산 자손을 계(戒)로써 훈육(訓育)하며 생을 마칠까 하오"
그가 태조에게 말하여 낙향할 뜻을 굽히지 않으니 이성계는 그를 보내주었다. 이후 고향 평산으로 돌아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자손들에게 과거(科擧)에 나가지 말고 좋은 벼슬을 취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
사후[편집]훗날 부음(訃音)을 전해들은 태조는 특별히 그를 높이 평가하여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하고, 사간(思簡)이란 시호(諡號)를 증시하였다.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유촌리에 안장되었으며,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 도로변에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⑯ 향토문화재 제 16호 목은 이색 영당
지정별 : 향토문화재 제16호
지정일 : 2012.04.20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노동리 316-1
왕징면 노동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 영당(影堂)은 고려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686년(숙종 12)에 창건되었다. 원래의 영당은 한국전쟁 중 전소되었는데, 1973년과 1993년 두 차례에 걸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맞배지붕을 갖춘 목조건물이다.
사당 내에 모셔진 목은 선생의 영정은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수송영당의 원본을 모사한 것이다. 영당 좌측에는 서울에서 조사된 석곽묘가 이전 복원 되어 있다. 목은 선생의 영당이 이곳에 세워진 연유는 2가지 인연 때문인데, 첫 번째는 고려 창왕을 옹립하여 왕위에 오르게 한 연유로 1389년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얻은 뒤에 長湍에 유배된 것이고, 두 번째는 그의 5대손인 이명은이 노동리 일대에 정착하여 한산이씨(韓山李氏)의 집성촌을 이루게 된 것이다.
영당의 건립은 이명은의 6대손 이극번 등의 발의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색(1328~1396)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영숙(潁叔)이고 호는 목은(牧隱)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이색은 15세에 부음(父陰)으로 별장(別將)의 직을 얻었고,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進士)가 되어 1348년(충목왕 4)에는 원(元)의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다. 1351년(충정왕 3)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하였으며, 1353년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1355년 다시 원의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1365년 신돈이 등용될 때, 그는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된 후에는 신병으로 관직을 사퇴했으나 1375년(우왕 1)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고, 13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가 되었다.
1389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문하시중이 되었으나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昌을 즉위시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득세하자 장단(長湍)·함창(咸昌) 등지에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에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여흥(驪興)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고, 조선 개국 후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하였으며, 이듬해 여강(驪江)의 신륵사(神勒寺)로 가던 중 사망하였다..
⑰ 향토문화재 제 17호 조선왕가
지정별 : 향토문화재 제 17호
지정일 : 2012.04.20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현문로 339-10 조선왕가
조선왕가는 고종황제의 영손(令孫)으로 조선조 역대 왕의 종묘제례(宗廟祭禮)를 관정하였던 황족 이근(李芹)의 고택이다. 1800년대에 창건되고 1935년에 99칸으로 중수(重修)된 황실가(皇室家)의 전통 한옥으로 현재 연천에 염근당과 자은정이 이건(移建)되어 있다.
조선왕가에 흐르는 기운을 받으며 전통한옥 체험을 할 수 있는 국내 유일한 왕가체험 시설이다. 왕가로 밝혀지는 과정의 스토리와 전통한옥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잘 이루어져 있는 조선왕가 전통한옥체험시설에서는 계절별 전통음악회, 연잎밥만들기, 약선요리, 한방훈육테라피, 전통한옥숙박체험 등 고품격 체험을 즐길 수 있다.
더불어 고택.종택 명품화로 명인 이강연 선생의 전통고가구 작품도 체험할 수 있으며, 단체체험객을 위한 세미나실, 왕실전통으로 내려오는 비방의 왕가비훈욕실, 생명과 자연을 주제로한 미술관, 자연치유식단 약선식 식당, 자연의 대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야외데크, 마음의 여유와 힐링 휴식이 있는 케페테리아, 허브디톡스 체험장, 글램핑 야외캠프장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⑱ 향토문화재 제 18호 전 기황후 릉터
지정별 : 향토문화재 제 18호
지정일 : 2013.11.25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상리 산 145
기황후 릉터는 상리초등학교에서 옥계리 방향으로 1.4km 가다가 우측의 재궁동 방향으로 1.6km 들어가면 농장 못 미쳐 좌측 경작지 상단의 능선 자락 수풀 속에 위치한다.
고려인 자오(子敖)의 딸로, 고려말 권신 철(轍)의 누이동생이며 북원(北元) 소종(昭宗)의 생모이기도 하다. 1333년(충숙왕 2)에 원의 휘정원(徽政院)에 있던 고려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추천으로 궁녀가 되어 순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정후(正后)인 다나시리(答納失里)의 학대를 받았다. 1339년 황자 아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臘)를 낳았으며, 1340년 2월 백안세력이 물러나자 4월에 제 3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가 된 뒤 곧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를 배경으로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1368년 원의 멸망 후 행적을 알 수 없다. 기록에 황후총(皇后塚)이라 하여 ‘현에서 동쪽 20리 재궁동에 소재하며 속전하기를 원(元) 순제(順帝) 기황후가 장례를 고국에서 치르기를 원해 이곳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출토유물 남향한 묘지(墓地)는 현재 묘와 관련한 뚜렷한 흔적은 없으나, 곡담에 쓰였을 와편이 수습된다. 근래에 석수 2점이 발견되어 현재 연천향토사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기황후(奇皇后)(생몰년 미상)는 원(元) 순제(順帝)의 황후로 몽골명은 완췌후두(完者忽都)이다.
⑲ 향토문화재 제 19호 이진무 묘
지정별 : 향토문화재 제19호
지정일 : 2012.11.25.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왕림리 산38
처사 이진무 묘는 삼거리 부처골 마을과 경계인 왕림리 고조울의 부처고개 정상부에서 비포장의 군사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170m 정도 오르다 보면 도로 왼쪽의 사면에 위치한다.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와 합장인 봉분은 원형으로 직경 750cm·높이 180cm이며, 봉분 전면에 혼유석·상석·향로석,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을 한 쌍씩 갖추고 있다. 상석의 규모는 너비 140cm·폭 85cm·두께 25cm이고, 향로석은 높이 54cm·너비 27cm·두께 43cm이다. 사각의 지대석을 갖춘 망주석의 높이는 140cm, 금관조복의 문인석의 높이는 128cm이다. 묘비는 정남향의 봉분 오른쪽에 옥개석이 없는 월두형의 양식을 하고 있다. 화강암 재질의 비신은 높이 118.5cm, 폭 55.3cm, 두께 17.5cm이다.
한국 전쟁 당시 탄흔으로 약간의 파손이 있지만, 미수 허목이 직접 짓고(撰) 해행서체로 쓴(書) 글로 미술사나 금석학적으로 뛰어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건립 연대는 1680년(숙종 6)이다.
취우옹(醉愚翁) 이진무(1608~1679)의 자는 무경(茂卿)이며, 본관은 전주(全州)로 효령대군의 후예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미수의 종형인 허후(許厚)의 문하에 들면서 깊은 영향을 받고 설옹(雪翁)을 평생 스승으로 섬겼다. 이러한 사제관계는 그를 평생토록 예법(禮法)을 좋아하고 고인(古人)들의 절개를 흠모하면서 고상한 뜻을 가지게 한 계기가 되었으며, 특히 임진강의 웅연(熊淵)가에 위치했던 취우당(醉愚堂)에서 일생을 무위자연의 도가적 사상과 처사적 몸가짐으로 사돈인 미수 허목과 교유하며 처사로 유일(遊逸)한 인물이다.
⑳ 향토문화재 제 20호 권 희 묘
지정별 : 향토문화재 제20호
지정일 : 2012.11.25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현리 산 167
위치는 백학면 두현리 산 167번지의 안동권씨(安東權氏) 묘역의 중앙에 위치한다.
묘는 활개와 용미를 갖추었고, 봉분은 원형이며, 규모는 직경 450cm·높이 150cm로서 봉분 전면에 상석, 좌·우에 문인석 2기, 좌측에 묘비가 있다. 상석의 규모는 너비 180cm·폭 60cm·두께 30cm이고 문인석의 높이는 좌·우 190cm로 같다. 묘비는 팔작지붕의 옥개석과 비좌, 비신으로 구성되었으며, 4면에 음기가 있다.
전면에 비문은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行資憲大夫行承政院 都承旨權公之墓」라 음각되어 있으며 후면의 음기와 함께 미수 허목이 전서와 행서로 글을 썼다. 건립 연대는 1667년이며, 규모는 비좌 높이 37cm·너비 120cm·두께 69cm, 비신은 높이 19cm·너비 64cm·두께 19cm이고, 옥개석은 높이 27cm·너비 97cm·두께 27cm이다.
권희(1547~ 1624)의 자는 사열(思悅)이며 호는 남악(南岳)이다. 1568년 진사가 되고, 158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한림·주서·전적을 거쳐 각 조의 낭관 및 양사의 벼슬을 지냈다. 이어 호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로서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592년 종묘서령이 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역대 왕들의 신주와 왕실의 어보를 안전하게 모시고 행재소에 도착하여 난이 끝난 뒤 종묘의 典禮를 모두 복구할 수 있게 하였다.
1596년 장령·사간·종부시정·헌납·집의 등을 거쳐 진위사 서장관(陳慰使 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예조·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1604년 황해도 감사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충청도 관찰사·강화유수·금산군수·광주목사 등을 지냈고, 1607년 도승지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한성부 좌윤·형조참판에 제수되었고, 1624년에는 임진왜란 때 왕조의 신주를 모신 공으로 자헌대부에 올랐다. 호성(扈聖)·선무(宣武)의 원종공신으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㉑향토문화재 제 21호 미강서원(嵋江書院) 터
지정별 : 향토문화재 제21호
지정일 : 2014. 12. 9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737-2
미강서원은 1691년(숙종 17)에 미수 허목(眉叟 許穆)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2년 뒤인 1693년(숙종 19)에 ‘미강(湄江)’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 후 1871년(고종 8) 봄에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당시 사우만 철거되어 위패는 그 자리에 매안(埋安)하고 설단(設壇)하여 향사를 지내왔으며, 강당과 재실은 유지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그 동안 남아있던 강당과 재실마저 소실되었으며 1970년 다시 설단하고 단비(壇碑)를 세웠다. 현재까지 미강서원은 복원되지 못하였으나 매년 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미강서원은 한국전쟁으로 전소되어 1970년 미강단소 유림회에 의해 단과 비가 조성되었고 1973년부터 매년 봄에 제향이 이어져 오고 있다.
㉒향토문화재 제 22호 홍길민 묘
지정별 : 향토문화재 제22호
지정일 : 2014. 12. 9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 산 24
남양군 홍길민(南陽君 洪吉旼)은 1353(고려 공민왕2)~1407(조선 태종7) 고려와 조선의 무신, 검교중추원부사(檢校中樞院副使) 보현(普賢)의 아들로 전법정랑(典法正郞)으로서 1376년(우왕 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강릉도 안렴사(江陵道按廉使)·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지냈다.
1390년(공양왕2)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가 되었으나 정몽주(鄭夢周)가 우정승에 임명되자 전제(田制)를 문란케 하고 언관(言官)을 추방한 장본인이라 하여 고신(告身)에 서명을 거부했다가 파직되었으며 1392년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어 개국공신(開國功臣) 2등으로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고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에 이르렀고 받은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민통선 봉곡동 초소를 통과하여 1.2km 정도 북쪽으로 가다보면 남향하고 있는 나지막한 구릉의 해발 60m에 남서향하여 위치하는데 5m 아래에 홍여방의 묘가 위치하고 방형인 봉분은 쌍분으로 좌측(서쪽)은 한정택주(閑靜宅主)인 청주경씨(淸州慶氏)의 봉분이며 규모는 직경 400cm·높이 190cm이
다.
호석을 갖춘 동쪽 홍길민 묘의 봉분 역시 방형으로 규모는 직경 400cm, 높이 180cm이고 석물로는 묘표, 문인석 3기 외에 근래에 마련한 상석·4각 향로석 등이 있으며 문인석은 좌측에 1기, 우측에 2기가 있는데 좌측의 것은 높이 178㎝로 얼굴에 마모가 심하다.
우측에 있는 2기 중 앞의 문인석은 높이가 174㎝, 뒤의 것은 높이 167㎝이다. 묘표는 묘 전면 1 계체석 간에 위치하여 비좌·비신·좌측이 반파되어 우측의 반만 남은 옥개석을 갖추고 있으며 규모는 비좌 높이 20cm·너비 70cm·두께 42cm, 비신 높이 108cm·너비 64cm·두께 17cm이다.
비신은 전후 양면에 비문이 있고, 전면에 종4열로 `東 南陽君文景公墓 公姓洪諱吉旼□ 子二月初至日 西 閑靜宅主慶氏墓 大夫人系淸州 卯三月初三日葬`(동 남양군문경공묘 공성홍휘길민 자이월초지일 서 한정택주경씨묘 대부인계청주 묘삼월초삼일장)의 비문이 있다.
㉓향토문화재 제 23호 왕순례 묘
지정별 : 향토문화재 제23호
지정일 : 2014. 12. 9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산 9
고려 왕족으로 본관은 개성이며 본명은 왕우지이다. 고려 현종의 원손(遠孫)으로 왕휴(王休)의 후취인 오씨의 소생 왕미(王美)의 아들이다. 고려가 망한 뒤 조선 왕조의 핍박을 피해 공주 왕촌(지금의 충남 공주시 상왕동 중동골(추정)에 성을 제씨로 바꾸고 숨어 살았다.
태조는 즉위 초(1392년)에 전왕조에 대한 예우를 천명하여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의 앙암사에 고려 태조의 동상을 모시고 고려조 8대왕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1451년(문종 원년)에는 건물을 수리하고 고려 16공신을 함께 배향토록 하였다. 이때 비로소 숭의전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문종은 교지를 내려 고려조의 제사를 받들 후손을 찾아 궁궐로 예우하여 들이도록 하였으나 모두 성을 바꾸고 숨어 살았기에 쉬이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 공주에서 숨어 살던 왕우지가 고려 왕족의 후손임이 알려지게 되자, 그를 도성으로 불러드려 왕순례로 개명하게 하고 이듬해인 1452년(단종 원년) 7월에 숭의전(崇義殿) 초대 부사(副使)에 책봉하여 고려 왕실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숭의전의 전감(殿監) 또는 참봉을 역임하였다. 미산면 아미리 잠두봉 아래에 묘가 있다.
㉔향토문화재 제 24호 심상우 묘
지정별 : 향토문화재 제24호
지정일시: 2014. 12. 9
출생년도: 1883년(계미년)
출생장소: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유촌리
전사일시: 1908년 10월 15일
전사장소: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가루재
심상우(沈相禹) 의병장은 1883년(계미년)에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유촌리에서 부친 심응택(沈應澤)과 모친 풍천 임씨(豊川 任氏)사이에서 태어났다. 심상우의병장은 어려서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품이었으며 애국심이 남달리 강했다.
소년시절 왜놈들이 가르치는 왜놈의 학교에는 다닐 수 없다는 생각에 보통학교로의 입학을 거부하고 독학을 하였으며 향교를 다니면서 한학공부에 전력을 다하였다. 항시 일본에 반감을 품고 때를 기다리던 심상우는 당시 연천에 주둔하고 있던 왕산 허위선생의 의병부대에 자진 입대하여 제3분견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수 차례 일본군들과 접전을 벌였으며 많은 일본군들을 사살하였다.
1908년 10월 15일 열악한 무기와 숫적 열세에 밀려 이 묘소에서 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백석리 가루재의 바위틈에서 부하들과 맞서 싸우다가 일본군의 흉탄에 25세의 아까운 나이에 전사하였다. 당시 미혼이었던 선생에게는 후손이 없어 선생의 장조카가 제사를 받들고 묘지 관리를 해 왔다.
㉕향토문화재 제 25호 숭의전 제례
지정별: 향토문화재 제 25호
지정일시: 2014. 12. 9
숭의전(崇義殿)의 전례(典禮)는 조선시대 역대 국왕이 치제(致祭)유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 그동안 행례의 규격이 폄하(貶下)되었고 규모가 축약되어 왔으며, 계승의 미비로 인하여 유구하게 보존되어 오던 전승체계가 단절될 수 있는 상황임.
㉖향토문화재 제 26호 연천 김잠 묘
●지정별: 향토문화재 제 26호
●지정일시: 2018. 01.09
●소재지: 연천군 읍내리 산 1-1(아랫샘골)
●건립연대: 1932년
●글 지은이: 이송(李松)
●두전쓴이: 김익승(金益承)
●글 쓴이: 김익훈(金益薰)
●글씨크기: 두전 8.0cm 음기 2.5cm
●비석질: 개석, 화강암 비신, 화강암 대석
●비 크기: 전체 높이 263cm, 비신높이 165cm, 너비 62cm, 두께 32cm
1932년에 건립된 이 비는 비좌개석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개석은 팔각지붕의 형태이고 대석에는 안상문만 있다. 비의 마멸 상태는 양호하니 총탄 흔적이 앞면에 60곳이 남아있어 판독이 불가능한 곳이 있으며묘소에는 정부인 평택임씨와 합장으로 상석, 향로석, 족석. 혼유석. 계체석. 망주석이 있다. 김잠(1641~1732년)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이준(而峻), 호는 수와(睡窩)이며 할아버지는 증좌승지(贈左承旨) 은(檼)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흥지(興祉)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 아산 이씨(牙山李氏)로 이덕관(李德寬)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년)적성현감을 지낸 후 여러 내직을 역임하고, 1699년 연천현감으로 부임하여 1704년까지 재직하였다. 뒤에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김잠은 연천현감으로 오랫동안 재임한 목민관으로 유명하며 생전에 포천군 가산면 시우촌에 살면서 서울로 나막신을 신고 출퇴근하였다고 한다. 92세로 장수(長壽)하였다.
㉗향토문화재 제 27호 해주오씨한양종중세장지표석비
지정별: 향토문화재 제 27호
지정일시: 2018.01.09.
소재지: 왕징면 북삼리 산131
비는 오석 비신에 화강석 지붕을 올린 형태로 화강석 지붕은 최근에 조성하였다. 비신의 전면에 위창 오세창의 글씨로 “海州吳氏漢陽宗中世葬地”가 음각되어있다.
위창 오세창은 1879, 16살의 나이로 역과에 합격하였고 후에 <한성순보>의 기자로 활약하였다. 훗날 ‘한성주보’에서 기자를 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만세보’와 ‘대만민보’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위창 오세창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33인의 한 사람이었다.
위창 오세창은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서예에도 능하고 독자적인 서체(위창체, 오세창체)를 창안하였다. 비신에 새겨진 위창 오세창의 글씨는 표석비로 남겨진 위창의 작품중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㉘향토문화재 제 28호 노곡리 선단각 제례
지정별: 향토문화재 제 28호
지정일시: 2018.12.13
소재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 <장고개>
1392년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망하고 이씨조선이 개국을 하자 고려 조정의 신하들이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는 일념으로 이곳 노곡리로 낙향하여 해마다 화주(貨主)를 정하고 제관(祭官) 12명을 4성(四姓)인 원주원씨. 동주최씨 하동정씨. 문화류씨. 등이 차례대로 제례를 올리다가 추후 남양홍씨가 추가로 제례에 참석하며 매년 8월 상정일(上丁日)을 택하여 산신제위전에 현재까지 600여년간을 봉사(奉祀)하여 왔다.”고 밝히고 이 제례는 6. 25전쟁이 나던 해에만 잠시 중단하였다가 수복이 되며 다시 시작하여 현재까지 단 한해도 거른 적이 없는 중요한 제례의식으로 마을에서는 신앙처럼 받들고 있는 의식으로 현재노곡리 00번지 장00재에 선단각을 세우고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㉙향토문화재 제 29호 심덕부묘
지정별: 향토문화재 제 29호
지정일시: 2018.12.13
소재지: 미산면 아미 1리
심덕부
(고려 충숙왕 15)∼1401(태종 1)
조선 개국 공신으로 미산면 아미 1리에 묘가 있다. 본관은 청송(靑
松), 자는 득지(得之), 호는 노당(蘆堂)·허당(虛堂)이다. 전리정랑 용
(龍)의 아들이다.
1332년 고려 충숙왕 복위년 말에 음직으로 사온직장동정에 출사한
이후 좌 우위녹사를 거쳐 1364년(공민왕 13) 수원부의 수령이 되었
다.
공민왕 말년에 판위위시사, 우왕 즉위 후 우상시를 거쳐 우왕 원년
에 예의판서에 올랐다. 그 후 밀직부사·상의회의도감사와 강계도만
호·의주부원수·서해도원수 등의 요직을 거쳤다.
1378년(우왕 4) 밀직사로 재임하면서 정조사가 되어 명에 다녀온
뒤 지문하부사로서 서해도원수를 겸하여 여러 차례 왜구 토벌에 공
을 세웠는데, 특히 1380년 도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최무선(崔茂
宣)이 제조한 화포를 처음 실전에 사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385년 문하찬성사로서 동북면상원수를 겸하여 북청(北靑)에 침입
한 왜구를 토벌하는 등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동북면에 침입한 왜
구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겨울에는 하정사로서 명에
다녀왔고, 귀국 후에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388년의 요동 출병 때에는 서경도원수로서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좌군에 속하여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도와주었다.
또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울 때 이성계·정도전(鄭道傳)·정몽
주(鄭夢周)와 더불어 주도적인 구실을 하여 이른바 9공신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공양왕 즉위 직후에 문하좌시중·경기좌우도·평양도
통사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청성군 충의백(靑城君忠義伯)에 봉해졌
다. 그러나 같은 해 말 무고로 일시 황해도 토산에 유배되었다.
그 뒤 1391년(공양왕 3) 다시 문하좌시중에 복직되고, 하정사인 왕
세자 석(奭)의 종사관으로 명에 다녀온 뒤 이성계·정몽주와 함께 안
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1392년 판문하부사로 조선의 개국을 맞아, 1393년(태조 2) 회군공신
(回軍功臣) 1등에 추록되었으며,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다. 1397
년 판문하부사, 이듬해에 영삼사사를 거쳐, 72세 때인 1399년(정종
1)에 좌의정이 되었다가 태종1년(1401년) 74세에 사망하였다.
공의 사망으로 조정의 의례를 3일간 정지하는 철조(撤朝) 3일, 미두
각 100석 부의(賻儀), 시호는 정안공, 태종이 예조에 명하여 麻田縣
(지금의 연천)에 예의를 지켜 장례를 치르게 하다.
공은 일곱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다섯째 아들인 온(溫)의 따님이 세
종대왕의 정실부인인 소헌왕후 심씨로 심온은 국구(國舅)가 되었으
며, 여섯 째 아들인 종(淙)이 태조의 부마가 되어,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거족(巨族)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처음 시호는 공정(恭靖)이며 나중에 정안(定安)으로 고쳐졌다.
4. 문화재 비지정 유적, 유물
① 웅연의 신서(神書)와 석문 하석(石文 下石)
위치: 연천군 왕징면 강내리 곰소(웅연)
관련인물: 미수 허목
보존상태: 양호
석문하석은 강내리의 동북쪽 임진강변의 단애(斷崖: 깎아지른 절벽)에 새겨진 암각문(岩刻文)이다. 이 곳에서 동북쪽 강건너에는 삼곶리 유적이 형성되어 있고, 남쪽 3km 지점에는 북삼리 유물산포지가 위치한다. 암각문은 임진강변의 암반 단애면(斷崖面) 상단에 미수 허목의 친필로「石文」·「下石」이라 새겨져 있고 주칠(경면주사)이 되어있다.
이는 웅연석문(熊淵石文)이 하단에 있음을 알리는 암각문으로 보여진다.「石文」은 자폭 21cm의 해서체로 비교적 큼직하게 새겨 있다. 이 암각문에서 약 4m 하단에는 '웅연석문(熊淵石文)'으로 알려진 기암(奇巖)이 있는데, 단애면에 새겨진 암각문의 내용은 이 기암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웅연석문은 바위 표면에 평행선과 교차선 등의 각종 기하학적 무늬가 돌출되어 있다. (아래 사진)바로 이글을 미수 허목선생은 귀신이 쓴 글이라 하여 신서(神書)라고 하였다.미수기언에 이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나열되어 있다.
이는 암석내의 성분의 차이로 표면이 풍화되는 과정에서 차별적으로 남게 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위 사진 중 신서(神書) 부분은 임진강댐이 담수를 하게 되면 물에 잠기게 되고 또한 접근이 어려워 이정표에 해당하는 석문하석은 탁본을 뜬 후 연천문화원에 암각을 하여 보존하고 있다.
② 관찰사 서유방 선정비(觀察使 徐有防 善政碑)
위치: 연천군 연천읍 현가리 71-1(연천문화원)
관련인물: 경기도 관찰사 서유방
보존상태: 양호
발굴장소: 연천시장 내
차탄천의 역사를 새롭게 밝혀 준 비(碑)
이 비(碑)는 조선 정조시대 경기도 관찰사였던 서유방의 선정비(善政碑)이다.
비석의 전면에는 觀察使徐公有防善政碑(관찰사서공유방선정비)라고 다소 큰 글씨로 새겨져 있으며 좌측에는 化流一道(화류일도)와 澤及殘縣(택급잔현)이라는 글씨가 작게 새겨져 있었으나 발굴과정에서 심하게 마모가 되어 판독을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뒷면에는 상지십삼년기유오월일립(上之十三年己酉五月日立)이라 씌어져 있어 이 비의 건립일을 기록하였다.
전면에는 선정비를 세우게 된 사유를 기록한 化流一道(화류일도)와 澤及殘縣(택급잔현)이라는 글귀가 2행 형식으로 새겨져 있다.
化流一道(화류일도)의 경우 물의 흐름을 한 곳으로 만들었다는 것과 澤及殘縣(택급잔현)으로 보아 당시 연천의 곳곳은 늪지와 못(澤)으로 이루어졌고 해마다 홍수로 인한 극심한 피해에 이르렀음을 알 수가 있다.
후면의 비석을 세운 날짜를 풀어보면 먼저 상지13년이란 조선 정조13년을 의미한다. 즉 서기 1789년을 의미하며 이 해가 기유년으로 오월에 세워졌음을 알리고 있다.
선정비가 최초로 발견된 장소(연천시장터)를 연결하여 추정을 해보면 이곳은 물길이 고르지 못하여 해마다 수해피해를 입었는데 이로서 차탄천의 물길을 오늘날과 같이 바로 잡은 사람은 당시의 관찰사 서유방이었으며 정조 시대였음을 알 수가 있다.
③ 기황후릉 터의 석인(石人)
위치: 연천군 연천읍 현가리 71-1(연천문화원)
관련인물: 원나라 기황후
보존상태: 양호
발굴장소: 기황후 릉터
연천문화원은 이를 근거로 1995년 지표조사를 실시해 주변에서 나뒹구는 석물(石物) 2기를 수습해 문화원 뜰 앞에 옮겨 놓았다. 기황후 능터 주변에는 고려양식의 어글무늬 기와가 많이 발굴된 점도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기황후 능터는 지난해 연천군 향토 문화재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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