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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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8-07 10:46 조회68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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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고려 공민왕 16)~?
고려 말 충신으로 중면 적거리 신포동에 묘가 있다. 본관은 순천, 자는 여건, 호는 금은이다. 정몽주의 문인으로 조선 초기의 은사다.
고려 말에 이방원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사예 등을 역임했다. 젊어서 이방원과 교분이 두터워 함께 곡산의 청룡사에서 공부도 했고, 성균관에서도 같이 수학했다.
조선 건국 후 연천에 낙향하여 현 연천읍 현가리 도당골에 숨어 지냈다. 태조가 여러 번 기용하려 했으나 불사이군(두 왕조에서 벼슬할 수 없다)이라는 곧은 절개와 신념으로 이를 거절했다. 태종이 등극하여 옛 벗인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그가 숨어 있는 산을 청화산이라 부르게 하고 저택을 하사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태종이 연천으로 거둥할 때 그가 와서 배알하여 몹시 기뻐했다고 한다. 이에 태종이 술을 권하면서 “추우반청인반취(秋雨半晴人半醉)”라고 시구를 짓자, 그가 대구를 맞추기를 “모운초권월초생(暮雲初捲月初生)”이라 하였다 한다. 태종이 옛날 공부하던 때를 생각하여 그를 황해도 곡산군수에 임명했는데, 소를 타고 부임한 뒤 사흘만에 사직하고 다시 은둔하였다고 한다.
또 임종 때에 스스로 명정에 ‘고려진사양소지구(高麗進士陽昭之柩)’라 쓰고 죽었다 한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끝까지 절개를 지키며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아니하고 생을 마치자 이양소의 부음을 전해들은 태종은 “이 사람은 살아서는 그 마음을 굽히지 않았고 죽어서는 그 몸을 더럽히지 않았다.”라고 하였고 시호를 청화로 내려주었다. 태종이 그의 충절을 높이 여겨 장지를 내려주고 무덤을 보호하는 수총군 4호를 배정하였다.
태종은 은둔생활에 들어간 이양소의 살아생전 5번이나 찾았다고 한다. ‘청구야담’에 의하면 처음 태종이 이양소를 찾을 때 ‘물색(物色)’으로 찾았다 한다. 어렵게 찾은 옛 친구를 그는 먼 길도 마다않고 서두르다 결국 개천에서 수레가 빠지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차탄천(車灘川)이라 불리는 연천읍 주위에 있는 냇가 이름의 유래가 된 것이다. 차탄천이라는 것은 수레가 빠진 개울이라는 뜻이며 수레울 또는 수레여울이라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군남면 왕림리(旺林里)라는 마을의 이름은 잘못 표기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태종이 이양소를 만나기 위해 도당골을 가던 중 이양소가 장진천(왕림리와 은대리 사이의 개천)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타고 오던 어가(御駕)를 다시 돌려 왕림리에 쉬면서 이양소를 기다렸는데, 당시 태종이 친히 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느티나무를 심고 정자터라 명명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왕림리(王臨里:왕이 임하신 동리)라 지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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